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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검색결과 : 601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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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생가

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충남 한산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을 만나 문객으로 있었다.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로 일본을 시찰하게 되자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공사관 서기생(1등서기관)으로 동행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박정양이 내무독판이 되자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의 참찬관에 임명되었다. 1896년 7월 의정부 총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독립협회 위원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1908년 YMCA 총무가 되었으며,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명예총무로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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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 생가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은 1858년 태안에서 태어났으며 15세에 상경하여 한학을 공부했다. 1894년 보성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1896년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경성신문』을 창간했으며, 8월에는『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월보과장과 보성사(普成社)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종일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손병희의 집에서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를 했으며, 2월 초순부터 3·1운동에 참가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해 한용운 3,000매, 인종익 2,000매, 안상덕 2,000매, 강기덕·김원벽 1,500매, 함태영 1,200~1,300매, 이경섭 1,000매씩 등을 직·간접적으로 배포하였다. 그는 박인호와 함께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국에 보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 위해『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그는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한 후 보안법과 출판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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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생가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충남 결성에서 태어나 1905년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13년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부산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했으며, 1916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유심(唯心)』을 발간하여 대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24일부터 27일 사이 승려 백용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27일 최린의 집에서 민족대표로 서명하였다. 3월 1일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어 크게 기쁘며 더욱 더 독립운동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계속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면서 1926년 시집『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저항문학 활동을 하였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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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고가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 646번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재홍은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 중학부를 마치고 같은해 9월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과 1917년 중앙YMCA 교육부 간사를 역임하였다.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11월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4년 시대일보 논설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투신해 조선일보 주필과 부사장, 사장 등을 두루 거쳤다. 1927년 1월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우파 이론가로 활약하였다. 이후 각종 필화사건,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대회사건, 1938년 5월 흥업구락부사건,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사건 등에 연루되어 1919년 이후 20여 년 동안 모두 9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1950년 제2대 총선에 출마하여 고향인 평택에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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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교회 신사참배 거부운동지

애양원교회(愛養園敎會)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여수노회 소속 교회로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다. 애양원교회는 1908년 3월 광주에서 설립되었으며, 1928년 2월 여수로 이전하였다. 1934년 화재로 인해 골조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전소되자 1935년 4월에 재건하였다. 손양원(孫良源, 1902~1950)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칠원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5년에는 일제의 궁성요배(宮城遙拜)를 거부하여 퇴학당했으며,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 아버지가 3·1운동으로 투옥되자 다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17년 10월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일본 유학 중에 기독교 교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귀국하여 경상남도 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1938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7월 여수의 나병원인 애양원 내에 있는 애양원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맞서며 일제의 폭정과 우상숭배를 비판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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