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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검색결과 : 79건) +

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동학 교수·사헌부 지평·공조참의·안동부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1900년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예산의 사저로 낙향하였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906년 홍주의병이 결성되자, 그는 여기에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며, 홍주성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면서 홍주의병의 재기를 도왔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곽한일·박윤식 등과 함께 공주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이남규를 일단 풀어주었으나 1907년 9월 26일 다시 기마대를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일본군 기마대는 압송 도중 온양(현 아산)의 외암동에서 그를 살해하였고, 이를 막던 아들인 이충구(李忠求)와 하인마저도 함께 살해하였다. 그가 순국한 사실은 민족지인『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일자)에 기사화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

이관직(李觀稙, 1883~1972)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연성학교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1907년 유인식·김동삼 등과 함께 경북 안동에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여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개화된 구국교육으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1910년 9월 신민회 회원으로 해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적합한 후보지역을 물색하기 위해 이회영·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지역을 시찰하고 독립운동기지 선정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신민회가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자 이동녕·이광·윤기섭·김창환 등과 함께 군사교관이 되어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담당하였다. 그는 경학사의 운영자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해 자금을 모집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배재학당의 학생동원 책임자로 활동을 전개하던 중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동학 교수·사헌부 지평·공조참의·안동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0년 그는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예산의 사저로 낙향하였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남규는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1906년 홍성 일대의 유생들이 홍주의병을 일으켰을 때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으로부터 선봉장의 직책을 받아 활동했다. 또한 홍주의병이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후 의병장 민종식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면서 홍주의병의 재기를 도왔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곽한일·박윤식 등과 함께 공주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그를 일단 풀어주었으나 1907년 9월 26일 일본기마대를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기마대는 압송하던 도중 아산의 평촌에서 그를 살해하였으며, 이를 막던 아들 이충구(李忠求)도 이때 일본군에 의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세윤(崔世允, 1867~1916)은 본관이 흥해이며, 호는 농고(農皐)이다. 최세한(崔世翰)으로 불리기도 했다. 1896년 안동의진의 아장(亞將)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정환직이 아들 정용기에 이어 산남의진의 2대 대장에 취임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흥해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어 제2대 대장 정환직이 순국하자, 최세윤은 제3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최세윤은 1908년 2월 산남의진의 본대가 머물고 있는 보현산 거동사(巨洞寺)에 도착하였다. 그 후 한 달 정도 지나 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최세윤은 대장에 오르자 산남의진이 목표로 삼고 있던 관동지방으로의 북상계획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일대에서 지구전을 펼칠 계획으로 부장들을 각 지역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지역별 책임자를 선정하고 본부를 남동대산(南東大山)으로 옮긴 최세윤은 경주·울산·흥해·포항 지역은 본부에서 직접 담당하도록 하였다. 산남의진은 곳곳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에 항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항전을 이...

화성회(火星會)는 1925년 1월 8일 안동 읍내 금남여관(錦南旅館)에서 창립되었다. 이 단체는 안동지역 청년회의 혁신·통일과 노농운동 지원, 새로운 청년단체의 조직 등을 목표로 삼았다. 창립위원은 이준태·권오설·권태석·김남수 등이 맡았다. 화성회는 청년운동을 혁신시키고 통일된 조직을 만들기 위하여 각 면 청년회를 조직적으로 지도하였다. 이러한 화성회의 활동은 1925년 8월 8개 청년회가 연합하여 안동청년연맹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한 청년회의 사상적 교육을 위해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강연회 강사는 당시 안동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운동가였던 김남수·이준태·권오설·김원진 등이었다. 김남수는‘사회운동의 본류’, 이준태는 ‘노농운동의 의의’, 권오설은 ‘「리부크네히트」와「룩센부르크」’, 김원진은 ‘무산계급의 활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안동지역 사회운동단체들을 선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화성회는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을 지원하...
국가수호 (검색결과 : 6건) +

국군 제8사단은 1950년 8월 1일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으로 안동이 위기에 처하자 안동철수를 결정하였다.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접적이 경미한 제10연대, 제21연대 순으로 철수를 실시하고, 제16연대는 주력 부대가 철수하는 동안 계속해서 접적을 유지한 후 수도사단 제1연대의 엄호 하에 후위로서 철수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제10연대 철수 후 제21연대가 미처 강안에 도착하기 전에 안동교와 안동철교가 폭파됨으로써 강을 건널 수 없었다. 8월 1일 오전 7시 30분 무렵이었다. 안동교와 안동철교 폭파는 군단이 안동에서 철수한 후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교량들이 폭파되자 제21연대 장병들은 제방 쪽으로 밀려 한동안 우왕좌왕하다가 무거운 장비를 모래 속에 묻어 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도하를 강행하기 시작하였다.
북한군은 강을 건너 철수하는 국군병력에게 거의 조준사격을 퍼부어 사상자와 익사자가 속출하였다.특히 제1대대 제2·제3중대...

북한군의 남침 직후 제주도에서 교육중이던 한국해병은 1950년 7월 15일 출정을 위해 제주항을 떠났다. 3개 보병 중대와 1개 수색대로 편성된 500여 명의 해병대는 제주항을 떠나 16일 오전 8시에 군산에 입항했다. 이 부대가 군산에 상륙한 목적은 군산항에 비축된 정부미를 안동호에 적재하는 것을 엄호하는데 있었다.
부대장 고길훈 소령은 정부미를 비축 중인 군산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의도로 장항에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고길훈부대는 장항에서 20명을 사살하고 4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지만, 아군도 20명이 전사하였고 10명이 부상을 당하는 손실을 입어 군산으로 철수해 적의 도하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강안 방어를 했다.
그 후 고길훈부대는 북한군의 우회공격을 저지시키기 위해 군산시 경비, 개정리 일대, 금강 남안 일대를 수색·정찰했다. 또한 서해안지구사령관 신태영의 지원 요청으로 이리 방어를 위해 제3중대를 보냈다. 제3중대는 장신리 일대에서 경찰병력 ...

북한군 제766부대는 북한군의 남침 직후 후방을 교란하고자 태백산 일대로 침투하여 포항방면으로 남진하였다. 북한군은 1950년 8월 1일 오전 7시부터 1개 대대 규모가 273고지를 발판으로 공격하고 다른 1개 대대 규모가 월전삼거리 정면에서 공격하여 국군 기갑연대를 동북에서 압박하였다. 북한군은 진보를 장악함으로써 영덕 - 안동간의 유일한 횡단도로를 제압하고자 하여 많은 병력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월전삼거리 북쪽 500m의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1장갑대대는 잠목쪽에서 침투하는 북한군을 맞아 세 차례나 고지를 뺏고 빼앗는 격전을 벌이다가 월전삼거리까지 추진된 장갑차와의 협공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경찰대대는 273고지에서 연대 측방으로 침투하는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국군 기갑연대장은 북한군이 이틀간 정면 돌파를 시도하다 좌절되자, 이번에는 연대의 동쪽 배후로 우회해 진보 - 청송간 도로 쪽...

국군 제6사단은 1950년 8월 13일 군단의 명령에 따라 지형적으로 유리한 효령 일대에서 방어하기로 계획하였다. 사단은 인접 사단과의 긴밀한 협조 아래 도원리와 군위, 의흥을 경유해 Y방어선의 일부인 매봉산과 산운동 일대로 철수해 진지를 편성하였다.
8월 15일 이른 아침, 안동을 떠나 군위에 집결한 북한군 제1사단은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40여 분에 걸쳐 실시한 후 3대의 전차를 선두로 제7연대 정면을 일제히 공격하였다. 아군의 포화가 적의 대열에 집중되었으나, 전투대형으로 산개한 적은 사격과 각개약진으로 접근함으로써 이후 이 일대에서 백병전을 비롯한 치열한 공방전이 반복적으로 전개되었다.
공격준비를 재정비한 적은 17일 15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병수동 일대에 산개한 약 1개 연대의 적은 북쪽에서 제3대대를 견제하고, 효령 일대에 전개한 1개 대대는 제1대대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국군 제 6사단은 21일까지 매봉산 정상을 중심으로 사주방어태세로 적에게 타격을 가하며 진지를 고...

국군 제8사단은 죽령 일대에서 철수하여 1950년 7월 24일 재편성을 완료하였다. 사단은 3개 연대를 석탑동 - 364고지 간의 20㎞에 달하는 내성천 연변에 배치하고 영주 - 옹천 - 안동 축선 방어에 중점을 둔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 제10연대 제1대대는 금광리 북쪽의 334고지에 북한군의 관측소가 설치된 것을 확인하였다. 이 고지는 5번 도로와 국군 제8사단 방어지역 중앙 일대를 감제할 수 있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였다. 제1대대는 334고지에 북한군이 증강되기 전에 이를 탈취하여 그들의 공격을 지연시킬 복안을 세우고 26일 15시에 역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데다 때마침 5번 도로상에 나타난 SU-76 자주포 3대와 45밀리 대전차포 2문의 집중 포격을 받게 되어 공격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무렵 유엔군 전폭기와 B-26폭격기 편대가 작전지역 상공에 나타나 영주 일대를 폭격하였다. 그 후 국군 제8사단 예하부대들은 북한군 제12사단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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