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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검색결과 : 61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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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부자 순국지 - 외암리

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동학 교수·사헌부 지평·공조참의·안동부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1900년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예산의 사저로 낙향하였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906년 홍주의병이 결성되자, 그는 여기에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며, 홍주성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면서 홍주의병의 재기를 도왔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곽한일·박윤식 등과 함께 공주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이남규를 일단 풀어주었으나 1907년 9월 26일 다시 기마대를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일본군 기마대는 압송 도중 온양(현 아산)의 외암동에서 그를 살해하였고, 이를 막던 아들인 이충구(李忠求)와 하인마저도 함께 살해하였다. 그가 순국한 사실은 민족지인『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일자)에 기사화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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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구려 - 협동학교 교사

백하구려(白下舊廬)는 1909년부터 1910년까지 협동학교(協東學校) 교사로 사용된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의 생가 사랑채이다. 백하구려는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단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랫단 기단은 앞쪽으로 3m 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의 주인이었던 김대락은 1907년 내앞마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설립되자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초에 이르러 신교육을 수용하면서 백하구려를 협동학교 교사로 제공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변화는 안동은 물론 영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1910년 12월경 김대락은 마을과 인근의 청장년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삼원포(三源浦) 이도구(二道溝)에 정착였다. 1911년 6월 경학사(耕學社)와 1913년 공리회(共理會) 결성에 참여하여 「공리회취지서(共理會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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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고택 - 이만도 집

향산고택은 한말 의병장이자 1910년 10월 10일(음력 9월 8일) 단식 순국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와 그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을 펼친 아들 이중업(李中業, 1863~1921), 며느리 김락(金洛, 1862~1929), 손자 이동흠(李棟欽, 1881~1967)과 이종흠(李棕欽, 1900~1976) 등이 살던 집이다. 이만도는 1895년 12월 을미의병이 일어날 때,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고 '을사늑약'의 파기와 조약에 찬동한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유서를 지어 놓고 단식을 시작한지 24일만인 같은 해 10월 10일(음력 9월 8일) 순국하였다. 이러한 그의 뜻을 아들 이중업이 이어갔다. 이중업은 부친과 함께 예안의진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파리장서의거'를 이끌었다. 1920년 11월부터 중국의 쑨원[孫文]과 우페이푸[吳佩孚]에게 독립청원서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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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 이상룡 생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1895년 의병항쟁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었다.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 서면서, 다른 곳과는 다르게 군사조직과 군사력 양성에 앞장섰다.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1911년 이상룡은 문중 사람을 이끌고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여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 등을 이끌며, 서간도지역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올라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그 뒤 1932년 중국 길림성 서란현 소과전자촌에서 서거할 때까지,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시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후손들은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그의 뜻을 받들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끈질기게 항일운동을 펼쳤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상룡의 동생 이상동·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이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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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생가

신돌석(申乭石, 1876~1908)은 1896년 영해의진에 참가했다고 전한다. 그는 1906년 3월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영해·울진·원주·삼척·강릉·양양 등 경상도·강원도 일대에서 태백산맥의 산간지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오르내리며 의병항쟁을 펼쳤다. 1907년에는 일본군 편을 들던 영덕의 관공서를 격파했으며, 영양에서는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물리쳤다. 경주의 대산성에서도 수일 간 전투를 벌였으며, 영덕의 조현(鳥峴)에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10월에는 영해경무서를 습격하여 경찰을 추방하였다. 1908년 1월에는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3월에는 안동·울진·삼척·강릉 등지의 의병과 연합하여 군세를 키우고, 춘양·황지·소봉동 등지에서 적을 격파했다. 이후 신돌석은 만주로 가려고 준비하다가 눌곡(訥谷)에서 김상렬(金相烈) 형제의 기습을 받고 숨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돌석의 집은 아버지 신석주가 1850년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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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 전투지

국군 제8사단은 1950년 8월 1일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으로 안동이 위기에 처하자 안동철수를 결정하였다.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접적이 경미한 제10연대, 제21연대 순으로 철수를 실시하고, 제16연대는 주력 부대가 철수하는 동안 계속해서 접적을 유지한 후 수도사단 제1연대의 엄호 하에 후위로서 철수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제10연대 철수 후 제21연대가 미처 강안에 도착하기 전에 안동교와 안동철교가 폭파됨으로써 강을 건널 수 없었다. 8월 1일 오전 7시 30분 무렵이었다. 안동교와 안동철교 폭파는 군단이 안동에서 철수한 후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교량들이 폭파되자 제21연대 장병들은 제방 쪽으로 밀려 한동안 우왕좌왕하다가 무거운 장비를 모래 속에 묻어 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도하를 강행하기 시작하였다. 북한군은 강을 건너 철수하는 국군병력에게 거의 조준사격을 퍼부어 사상자와 익사자가 속출하였다.특히 제1대대 제2·제3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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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고길훈부대 주둔지 - 옛 군산해양대학교

북한군의 남침 직후 제주도에서 교육중이던 한국해병은 1950년 7월 15일 출정을 위해 제주항을 떠났다. 3개 보병 중대와 1개 수색대로 편성된 500여 명의 해병대는 제주항을 떠나 16일 오전 8시에 군산에 입항했다. 이 부대가 군산에 상륙한 목적은 군산항에 비축된 정부미를 안동호에 적재하는 것을 엄호하는데 있었다. 부대장 고길훈 소령은 정부미를 비축 중인 군산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의도로 장항에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고길훈부대는 장항에서 20명을 사살하고 4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지만, 아군도 20명이 전사하였고 10명이 부상을 당하는 손실을 입어 군산으로 철수해 적의 도하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강안 방어를 했다. 그 후 고길훈부대는 북한군의 우회공격을 저지시키기 위해 군산시 경비, 개정리 일대, 금강 남안 일대를 수색·정찰했다. 또한 서해안지구사령관 신태영의 지원 요청으로 이리 방어를 위해 제3중대를 보냈다. 제3중대는 장신리 일대에서 경찰병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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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반변천 전투지

북한군 제766부대는 북한군의 남침 직후 후방을 교란하고자 태백산 일대로 침투하여 포항방면으로 남진하였다. 북한군은 1950년 8월 1일 오전 7시부터 1개 대대 규모가 273고지를 발판으로 공격하고 다른 1개 대대 규모가 월전삼거리 정면에서 공격하여 국군 기갑연대를 동북에서 압박하였다. 북한군은 진보를 장악함으로써 영덕 - 안동간의 유일한 횡단도로를 제압하고자 하여 많은 병력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월전삼거리 북쪽 500m의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1장갑대대는 잠목쪽에서 침투하는 북한군을 맞아 세 차례나 고지를 뺏고 빼앗는 격전을 벌이다가 월전삼거리까지 추진된 장갑차와의 협공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경찰대대는 273고지에서 연대 측방으로 침투하는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국군 기갑연대장은 북한군이 이틀간 정면 돌파를 시도하다 좌절되자, 이번에는 연대의 동쪽 배후로 우회해 진보 - 청송간 도로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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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 전투지

국군 제6사단은 1950년 8월 13일 군단의 명령에 따라 지형적으로 유리한 효령 일대에서 방어하기로 계획하였다. 사단은 인접 사단과의 긴밀한 협조 아래 도원리와 군위, 의흥을 경유해 Y방어선의 일부인 매봉산과 산운동 일대로 철수해 진지를 편성하였다. 8월 15일 이른 아침, 안동을 떠나 군위에 집결한 북한군 제1사단은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40여 분에 걸쳐 실시한 후 3대의 전차를 선두로 제7연대 정면을 일제히 공격하였다. 아군의 포화가 적의 대열에 집중되었으나, 전투대형으로 산개한 적은 사격과 각개약진으로 접근함으로써 이후 이 일대에서 백병전을 비롯한 치열한 공방전이 반복적으로 전개되었다. 공격준비를 재정비한 적은 17일 15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병수동 일대에 산개한 약 1개 연대의 적은 북쪽에서 제3대대를 견제하고, 효령 일대에 전개한 1개 대대는 제1대대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국군 제 6사단은 21일까지 매봉산 정상을 중심으로 사주방어태세로 적에게 타격을 가하며 진지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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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 전투지

국군 제8사단은 죽령 일대에서 철수하여 1950년 7월 24일 재편성을 완료하였다. 사단은 3개 연대를 석탑동 - 364고지 간의 20㎞에 달하는 내성천 연변에 배치하고 영주 - 옹천 - 안동 축선 방어에 중점을 둔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 제10연대 제1대대는 금광리 북쪽의 334고지에 북한군의 관측소가 설치된 것을 확인하였다. 이 고지는 5번 도로와 국군 제8사단 방어지역 중앙 일대를 감제할 수 있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였다. 제1대대는 334고지에 북한군이 증강되기 전에 이를 탈취하여 그들의 공격을 지연시킬 복안을 세우고 26일 15시에 역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데다 때마침 5번 도로상에 나타난 SU-76 자주포 3대와 45밀리 대전차포 2문의 집중 포격을 받게 되어 공격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무렵 유엔군 전폭기와 B-26폭격기 편대가 작전지역 상공에 나타나 영주 일대를 폭격하였다. 그 후 국군 제8사단 예하부대들은 북한군 제12사단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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