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좌진 묘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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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 |
종류 | 묘소 |
상태 | 원형보존 / 충청남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
정의 | 광복회·북로군정서·신민부·한족총연합회 등에서 활동한 김좌진의 묘가 있는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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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광복회/북로군정서/신민부/한족총연합회 |
관련 인물 | 서일(徐一) |
관련 내용 |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가노(家奴)를 해방했으며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해 신교육운동을 전념했다. 한말 계몽운동단체에 참여해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며 일제의 강제병합 후에는 서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한광복회에 참여해 자금모집을 하던 중 만주부사령의 책임을 맡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9년 서일을 중심으로 한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고 군사부 위원장 및 총사령관을 맡았으며,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정규군을 강화하는 데 노력했다. 1929년 자치조직인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했으나 1930년 1월 24일 자택 앞 정미소에서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했다. 김좌진의 유해는 1930년 1월 순국 직후 자택 뒤편에 임시로 두었다가 3월 25일 사회장을 치러 매장하였으며, 1934년 부인 오숙근이 홍성으로 옮겨 이호리 산에 다시 매장했다. 해방 후 이 곳으로 이장했다. |
참고 문헌 |
「故金佐鎭先生略歷」(1930년).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316-319쪽. 이을규,『 是也金宗鎭先生傳』.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兇報를 確傳하는 白治 金佐鎭訃音, 北滿 ○○運動者의 巨頭, 四十二歲를 一期로」. 『동아일보』, 1930년 2월 14일자,「幼年부터 武藝絶人 豪膽과 俠氣의 四十平生」. 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45·119·219·407·426·429·433·454·491쪽. 박환,『 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국학자료원, 2003, 132~166쪽. 박영석, 「白冶 金佐鎭將軍硏究」, 『국사관논총』51, 국사편찬위원회, 1994, 185~216쪽. 이성우, 「백야 김좌진의 국내민족운동」, 『호서사학』44, 호서사학회, 2006, 53~88쪽. |
지역정보
당시 주소 | 충청남도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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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묘비「대한독립군총사령관백야김좌진장군묘」를 통해 묘소를 확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