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유봉진 집터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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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3·1운동, 문화운동 |
종류 | 가옥 |
상태 | 멸실 / 2019년 현재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1번지 지번은 도로로 통합되어 멸실된 상황이다. |
정의 | 강화군 부내면 3·1운동을 주도한 유봉진의 집터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강화 3·1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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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
관련 인물 | 유봉진 |
관련 내용 |
유봉진은 대한제국 진위대 소속 군인이었으며 기독교 북감리교계 인물이었다. 유봉진은 강화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진위대에 복무하다 1907년 군대해산시 대일항전에 참전하였다. 이후 부천군의 장흥학교에서 1년간 복무하였고, 다시 강화에 돌아와 은세공업을 하며 1916년 길상면 선두리의 월오(月塢)학교에서 부교장으로 근무하였다. 유봉진은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 읍내(府內面邑內) 장터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3월 8일 자기 동네인 길상면 온수리(吉祥面溫水里) 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유부(黃有富)·황도문(黃道文) 등과 만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세우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튿날 교회로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였고 3월9일 온수리교회에는 수십명이 모여 장날을 이용,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 장터에는 1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운집하였다. 유봉진은 백마(白馬)를 타고 달려와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장터에 있는 종루(鍾樓)에 올라가 종을 마구 치며 시위군중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군청으로 가서, 군수 이봉종(李鳳鍾)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고, 만일 불응하면 군청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유봉진은 다시 시위군중을 향교로 인솔하여, 장터에서 체포된 유희철과 조기신(趙基信)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경찰서 앞에서 시위하자고 제의하고, 오후 5시경 경찰서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경찰서 건물을 파괴한다고 협박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과 장터에서 칼을 뽑아들고 진압하려 했던 조선인 순사보 김덕찬(金德贊)을 내보내라고 외쳐댔다. 이후 유봉진은 체포되어 192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유봉진은 출옥 후 1921년경 부천의 북도면에 사립 신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하였다가 3년 후 다시 길상면 온수리로 옮겨 사림 니산(尼山)학원의 복구에 힘썼다. 이후 감리교 전도사로 강화군 각지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하다 1943년 신사참배와 징병제 실시 등애ㅔ 반대하여 사직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참고 문헌 |
권보드레, 『3월 1일의 밤』, 돌배게, 2019 성민, 「강화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22, 2002 남기현, 「3·1운동기 인천지역 시위의 양상과 특징」, 『역사와현실』113, 2019 |
지역정보
당시 주소 |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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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강화동로 21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유봉진의 신문조서에 주소 및 신분, 직업이 표기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