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조소앙 가묘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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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
종류 | 묘소 |
상태 | 원형보존 / 현재 사유지 내에 있으며, 그 주변은 개인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다. |
정의 | 소앙 조소앙의 묘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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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공수학회, 대한흥학회, 동제사, 박달학원, 신아동제사, 반일대동당, 대한민국임시정부, 삼균주의청년동맹 |
관련 인물 | 조소앙(趙素昻) |
관련 내용 |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의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이며, 호는 소앙이다. 1887년 아버지 조정규(趙禎奎)와 어머니 박필양(朴必陽) 사이에서 6남 1녀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출생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형 조용하(趙鏞夏)와 함께 교하군(현 파주시) 월롱면(月籠面)에서 출생하였고, 동생들은 황방리(篁芳里)에서 출생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형제들인 조용하, 조용주(趙鏞周), 조용한(趙鏞漢), 조시원(趙時元), 조용제(趙鏞濟)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2년 성균관에 입학해 1904년 수료한 후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부립 제일중학(東京府立第一中學), 정칙영어학교(正則学園高等学校), 명치대(明治大)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유학 시절이던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우에노공원(上野恩賜公園)에서 매국노들의 행위를 규탄하는 대회를 열었으며, 공수학회(共修學會),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12년 귀국 후 경신학교(儆新學校)와 양정의숙(養正義塾) 등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으나 1913년 상해로 망명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홍명희(洪命憙)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에서 운영하던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청년혁명가(靑年革命家)를 양성하고, 진영사(陳英士)·황각(黃覺) 등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와 반일대동당(反日大同黨)을 조직하였다. 1915년에는 구국과 민족의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육성교(六聖敎)를 창안하였다. 1917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기초하고,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함으로써 이 문제가 국제기구에서 논의되는 성과를 거뒀다. 1919년 2월에는 각 지역 독립운동가 39명 명의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기초하였다.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부총장, 내무장, 국무위원 등 핵심간부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 내부의 사상적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지도이념으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창안하였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삼균주의청년동맹 등을 결성하여 국가건설운동에 전력했다. 1948년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평양을 다녀오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1958년 9월 순국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 문헌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소앙 공적조서」 삼균학회, 『소앙선생문집』, 횃불사, 1974. 양주군지편찬위원회, 『양주군지』, 1978, 1169~1170쪽. 양주문화원, 『양주군지』, 1992, 962~964쪽. 양주문화원, 『양주항일민족운동사』, 2002, 100~115, 332~336쪽. 조소앙 저, 김보성 외 1명 역, 『소앙집』, 한국고전번역원, 2019. 디지털양주문화대전(http://yangju.grandculture.net/Contents/Index?local=yangju) 경기 양주 초록지기마을(http://chorok.invil.org/index.html?menuno=2196&lnb=40101)\ |
지역정보
당시 주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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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양연로 255-145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현지 조사를 통해 조소앙 묘소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