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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임시포로 수용소는 1950년 8월 1일 대구수용소의 지소로서 부산 해동중학교에 설치되었다가 나중에 한국군 제2수용소로 바뀌었다. 한국군의 부산수용소는 작전지희권이 이양된 후 8월 12일자로 동래 미 제8군수용소와 합쳐져서 유엔군 제1수용소가 되었다. 수용소의 관리는 미 제8군의 감독하에 미군의 제8070헌병 호위중대와 포로 수속중대 및 한국군의 제100헌병 호위중대가 맡았다. 이 수용소의 적정 수용 규모는 약 5만 명이었다. 국군이 주부식의 보급과 경비를 맡았고, 행정과 여러 시설의 관리는 미군이 담당하였다. 한국군의 포로 경비연대는 1951년 4월 8일 헌병사령부 작전명령 제16호로 동 사령부 직할대대로서 포로 경비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제31·32 및 33대대 등 3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부산 제1수용소는 6개의 동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2개 동은 부상자가 수용되었다. 중공군의 참전이후 부산수용소는 늘어나는 포로를 수용하기 위하여, 제2와 제3구역, 제4구역 및 제5구역수용소가 추가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증가한 포로를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중공군의 남진에 따라 미 극동군사령부는 평양수용소의 포로를 1950년 12월 1일자로 부산지역으로 소개 완료하도록 하였고, 인천수용소의 포로는 5일자로 부산포로수용소로 모두 이송토록 하였다. 이 때 제10군단을 제외하고 미 8군하의 모든 포로는 부산지역으로 이송되어, 1950년 12월 말에는 수용된 포로가 13만 7,217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부산은 포로 외에 많은 피난민이 정착하고 있어서 유엔군의 보안에 위협이 우려되었고, 포로들을 고립시키고 시설이나 포로를 관리할 유엔군 요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거제도로 이송하게 되었다. |
참고 문헌 |
조성훈, 『한국전쟁중 유엔군의 포로정책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0, 38-40쪽.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하, 1997, 314-317쪽. 군사편찬연구소,『6.25전쟁사』10, 1995, 281-29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