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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인영 생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가옥
상태 변형 / 원래 ㅁ자형 가옥이었으나 사랑채는 일부 허물어지고 안채는 내부 일부가 변형되었고, 돌담 일부가 남아 있다. 이인영과 6촌인 이덕영씨가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 여주 군청에서 복원 중이다.
정의 정미의병에서 관동창의대장 및 13도창의대장으로 활동한 이인영이 태어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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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내용 이인영(李麟榮, 1866~1909)은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대항하여 1896년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원주지역에서 활동을 벌이다가 후에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에 합류해 활동하였다. 이인영의병은 제천의병에 합류하기 전까지 원주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약한 유일한 부대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에 이인영은 강원도 원주에서 다시 이구채(李求采)·이은찬(李殷瓚) 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바로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모태인 관동창의군이며, 이인영은 관동창의대장으로 취임하였다. 1907년 10월 이인영은 서울을 공략하기 위해 전국에 격문을 돌리고, 각 의병부대들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양주에 모인 각도의 의병장들은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이인영을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3도 연합의병은 결성 직후부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동대문 밖 30리(12km) 가량 지점까지 진출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1908년 1월 28일 이인영은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군사장 허위(許蔿)에게 후사를 맡긴 후 귀향하고 말았다. 장례가 끝난 뒤 의병들은 이인영에게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으나, 이인영은 3년상을 마친 후에 재기하겠다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13도창의대장인 이인영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인영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충청북도 황간군 금계동으로 이주했다가, 1909년 6월 7일 그곳에서 일제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끝내 부친의 3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1909년 9월 21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공문편안(公文編案)』, 1896년 7월 10일,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인영(충북) 판결문」,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재판소.
오영섭, 「한말 13도창의대장 이인영의 생애와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1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여주군사편찬위원회,『여주군사』1·2, 여주군, 2005, 493-494쪽.
이규용,『경주이씨 세손』, 작성시기 미상.
「이인영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기도 여주군 북면 교항리
주소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37-6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경주이씨 세손』과 『공문편안』에서 관련 내용과 현재 위치를 확인하였다. 이인영의 출생지는 자료마다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이인영(충북) 판결문」에는 출생지가 여주군 북면 내룡동으로, 국가보훈처의「공적조서」에는 본적지가 여주군 북면 고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인영의 아들 이규용(李圭容, 1916년 이전 출생)이 간행한 『경주이씨 세손』에는 이인영이 여주군 북내면 교항리(현 상교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공문편안』 1896년 7월 보고에도 여주군 북면 교항리에 이인영의 토지가 있음이 확인된다. 『경주이씨 세손』과 『공문편안』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되므로, 이에 의거해 위치를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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