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기장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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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종류 | 거리(시장) |
상태 | 멸실 / 예전 시장 터는 현재 여러 채의 가옥이 들어선 상태이고, 만세를 부르며 다닌 중심 길인 종로 거리는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
정의 |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면에서 청년ㆍ유지들을 중심으로 주민 수백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1919.4.5 동래군 기장장터 독립만세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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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
관련 인물 | 김수룡(金壽龍)/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催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오기원(吳基元)/최창용(崔昌鎔)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중 서울 모 신문사에 다니던 김수룡(金壽龍)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 이를 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催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오기원(吳基元) 등에게 보여주고 만세시위를 행하기로 협의하였다. 이들은 협의 끝에 거사일을 4월 5일 기장 장날인 오전 11시로 정하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위해 기장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최창용(崔昌鎔)과 교섭하여 면사무소의 등사판과 등사원지를 빌려 옛 장관청 등에서 등사하였다. 그 뒤 김도엽은 '양심발원 인도적 자유민족(良心發源 人道的 自由民族)'이라고 쓴 큰 기와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대서특필한 큰 기를 만들었다. 4월 5일 기장장터에 이르러 선언서를 군중들에게 반포하고 장터에 집합해 있던 수백 명의 군중들과 함께 조선만세를 외치며 주위를 돌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공포를 쏘면서 군중들을 위협했으나 시위는 5시까지 계속되었다. 주재소 경찰 만으로는 시위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동래경찰서에서 헌병대에 알려 일본군과 경찰 응원부대가 급파되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끝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4월 8일과 10일에도 이어졌다. 당시 기장장터는 현재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으며, 당시 장터가 있던 곳은 도로로 편입되거나 여러 채의 집들이 들어서 옛 기장장터는 사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機張郡 邑內面 東部洞 地籍原圖」, 1912. 「김도엽 등 9인 판결문」, 1919년 6월 1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199~202쪽. 독립운동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1207~1210쪽. 기장군지편찬위원회, 『기장군지』, 2001, 289~293쪽. 공태도, 『남기고 싶은 사진』, 기장향토문화연구소, 2008, 18쪽. |
지역정보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 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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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306-9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김도엽 등 9인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기장군 읍내면 동부동 지적원도」를 통해 기장장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기장향토문화소장인 공태도의 증언을 통해서도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