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동래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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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종류 | 시장 |
상태 | 변형 / 장터는 여전히 시장거리로 남아있지만 상가가 형성되고 건물의 현대화 등으로 많이 변형되었다. |
정의 | 1919년 3월 7일부터 19일까지 4차례에 걸쳐서 범어사 승려 및 학생, 동래고보 학생들 주도로 만세시위가 있었던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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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
관련 인물 | 김봉환(金奉煥)/차상명(車相明)/김영규(金永圭)/김상기(金相琦)/임명조(林命祚)/백정기(白正基)/이근우(李根雨)/허영호(許永鎬)/최응관(崔應觀)/김태준(金泰俊)/박창두(朴昌斗)/이달실(李達實)/박정국(朴禎國)/윤상은(尹相殷)/신종기(申鍾驥)/김재호(金在浩)/오시권(吳時勸)/박영환(朴永煥)/손태연(孫泰淵)/김충념(金忠念)/황학동(黃鶴東)/오병준(吳炳俊)/김상환(金相煥)/이영우(李英雨)/박영주(朴永珠)/지용준(池龍俊)/양춘도(楊春到)/손군호(孫君浩)/황만우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4일 서울에서 연락책인 김법린(金法隣)과 김상헌(金祥憲)이 범어사로 내려와 승려들과 청련암에서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6일 오후 범어사에서 선언식을 거행한 후, 3월 7일 동래 장날에 맞춰 30여 명이 시장 중앙에서 선언서를 배포하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경찰서로 돌진하였다. 이 시위에 참여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다. 3월 17일 범어사 명정학교 및 지방학림 졸업생 송별회 모임에서 18일 새벽 동래시장 인근 불교포교당(현 동래구청 내로 추정)으로 집결하기로 계획하였으나 밀고로 실패하였다. 18일 밤 40여명의 범어사 학생들이 동래읍성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르기까지 만세시위를 하고 자진해산하였다. 또 19일에는 범어사 학생들이 3차례에 걸쳐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동래고보에서도 3월 초 부산상업학교 대표와 서울학생대표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김귀룡·고영건·엄진영 등이 거사를 도모하였고, 3월 10일 경성고등공업 전문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선언서를 들고 동래고보 교사 이환을 찾아가 전달하면서 보다 계획적인 준비를 갖추어, 3월 13일 동래 장날 망미루와 동래읍성 남문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당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구 하나은행 동래지점에서 복산동주민센터까지 570m를 동래구에서 만세거리로 지정하고, 1996년부터 매년 3월 1일 독립만세 재현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
참고 문헌 |
「동래군 동래면 수안동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2,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컬렉션. 「김영규 등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년 5월 20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컬렉션. 「김영규 판결문」, 고등법원, 1919년 7월 10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컬렉션. 「김귀룡 등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년 6월 27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컬렉션. 독립운동편찬위원회, 『 독립운동사』3-독립운동사(하), 1971, 182~190쪽. 채상식, 「한말, 일제시기 범어사의 사회운동」, 『한국문화연구』4, 부산대한국문화연구소, 1991, 160~164쪽. 동래고등학교동창회, 『 동래고등학교 100년사』, 금성기획, 2002, 90~98쪽. 금정중학교, 『 금정중학교 100년사』, 새부산문화사, 2006, 75~93쪽. |
지역정보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수안동 462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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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부산 동래구 수안동 462-1 일대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김영규 등 판결문」을 통해서 관련 사실을 확인하였고「동래군 동래면 수안동 지적원도」를 통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