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전체 기간을 통하여 북한군․중국군 포로에 대한 한국군․유엔군의 관리와 대우 실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수용소의 위치도 공개되어 있었다. 이는 공산군 측의 한국군․유엔군 포로 관리 실상이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것과는 반대되는 현상이었다.
유엔군 관리아래에 소속된 모든 포로수용소는 1949년 제네바협약의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관리되었으며, 그 운영 상태는 국제적십사 대표들에 의해 수시로 검사를 받았다. 따라서 포로수용소의 질서는 포로자치제(포로 자신들의 의견에 따라 운영되는 제도)에 맡겨져 있었다.
포로수용소 안에서 포로들의 생활 모습은 아래와 같았다.
- 오전 5시 30분 : 기상과 동시에 아침식사
- 오전 6시 30분 : 전원 집합 점호
- 오전 7시 오전 : 일과 시작
- 오전 11시 30분 : 점심식사
- 오후 1시 : 작업 인원 집합, 오후 일과
- 오후 4시 : 일과 종료
- 오후 5시 : 저녁식사
- 오후 8시 : 점호 후 취침
저녁식사 후 취침 점호 전까지는 자유시간으로 각종 운동, 독서, 목욕, 세탁 등을 할 수 있었다. 유엔 측 포로들은 포로가 된 이후 계속 체중이 늘어났으며, 그들의 사망률은 유엔군 전투부대원이 한국의 풍토병에 감염되어 사망하는 숫자보다 오히려 낮았다. 남한 경비병들은 포로들의 처우가 자신들보다 좋아 이에 대한 반감을 갖기도 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포로 관리 방침을 그들의 노동력 활용과 교육에 두었다. 노동이 가능한 포로들은 여러 종류의 일들로 나눠서 하였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자기들이 쓸 물자의 운반과 도로 보수, 환경 작업 등 가벼운 노동이었다. 그 외에 수용소 안에서 항상 해야 하는 일에는 환자 간호, 부엌일, 목공일, 청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일과 속에 교양 강좌와 1인 1기의 실기 교육이 포함되어 희망에 따라 참석하도록 하였다.
포로에 대한 교육은 유엔군사령부의 민간정보교육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포로 교육 목표는 그들에게 기술을 훈련시키는 것 외에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사실을 가르치면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쟁 발발 과정, 유엔에 대해서, 전체주의에 대비한 민주주주의 내용, 자유세계 여러 나라의 발전 모습, 한국과 중국의 정치․사회․경제 문제 등이었다.
교육이 효과를 보자 1952년 3월에는 반공을 내세운 교재나 교육과정을 폐지하였다. 교재와 그 내용이 “긍정적 접근” 방법으로 바뀌었다. 즉 포로들에게 민주의의 가치는 교육되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교육하는 것은 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송환거부포로들에 대한 교육은 그들의 자립 능력을 키우는 훈련과 석방 이후의 생활에 적응할 능력을 키우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런 교육은 많은 포로들이 친공에서 반공으로 바뀌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좌익포로들의 사상을 약화시키면서, 아직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하지 못하고 중간적인 입장에 있는 포로들에게 공산 측보다 반공 진영에 가담하도록 하는 데 힘이 되었다.
그렇지만 친공포로들의 저항과 공산군 측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거제도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들에 의해 교육이 무시되거나 실시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친공포로들의 저항은 아직 포로들의 송환문제가 확정되지 않아서 늘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좌익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추진하는 교육에 공개적으로 협조하거나 반공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나중에 본국으로 송환된 후에는 자신에게 불리해져 큰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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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유엔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관리하는 기본 방침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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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포로수용소에서 처음 실시한 교육이 효과를 보자 나중에는 반공을 내세우는 내용이나 교육과정은 빼버렸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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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포로수용소에서 제공한 교육을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포로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행동하였나요?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로 나뉘어, 그들끼리 수용소 안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를 결정하기 위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중 제62동은 친공포로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조사단을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 벌이지고 있었다. 마침내 조사팀이 제62동 안으로 들어가자 친공포로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포로 77명이 사망하고, 140명이 부상했다. 또한 미군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에 판문점 공산군 측 대표단은 즉각 ‘수많은 우리의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혈사건’이라며 항의하였다. 이는 유엔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는 수용소 내 규율을 확립하기 위하여 돗드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으나, 폭동과 사건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제네바협약이 안고 있는 취약점으로 인하여 포로를 적절히 다루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북한 측은 북한공작원들을 계획적으로 수용소로 침투시켰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 친공포로 조직을 만들며, 자기들끼리 첩보(諜報; 상대편의 정보나 형편을 몰래 알아내는 일)를 교환하는 장소로 수용소 안에 있는 병원을 이용하였다. 친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 내에서 조직을 강화하여 세력을 넓혀 나가자 반공포로들이 이에 맞섰다. 자연 이들 간에는 유혈충돌이 발생하였다. 경비병들이 야간에는 수용소 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야간에 충돌하였으며, 포로들 사이에는 ‘전쟁’이라고 할 정도의 폭행과 살인 등이 벌어졌다. 친공포로들은 유엔군의 교육에 저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철물제조 교육 등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무기를 만들었다.
1952년에는 수용소장 돗드 장군을 납치하기도 하였는데, 이 사건은 이후 새로운 콜슨 준장이 그들의 요구안을 들어주는것으로 해결되었다.
포로수용소가 있는 곳은 지역이 좁고 막사들이 서로 밀집되어 있으며, 인근 민가와도 가까운데다 경비 병력도 충분치 못해서 포로를 통제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유엔군사령부는 수용소를 크게 개편하였다. 우선 포로 전체를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분리하고 각각 서로 다른 수용소에 나눠서 수용하며, 수용소의 크기를 작게 만들어 관리하기에 용이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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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포로수용소에서 친공포로들과 반공포로들은 어떻게 다투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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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포로수용소 안에서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 사이에 폭력을 사용하고 살인까지 하는 등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격렬히 싸운 것은 포로수용소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과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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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유엔군사령부가 포로수용소를 개편한 이유(수용소 시설과 관련된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개편하였나요?
휴전협상 의제 가운데 제4항에 해당하는 포로교환협상은 군사분계선협상이 분과위원회로 넘어간 1951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포로교환협상은 표면상으로 비교적 간단해 보였다. 왜냐하면 제네바협약 제118조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된 후 곧바로 석방되고 송환하여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로 가운데 귀국을 원치 않는 자도 있을 것이며, 자기 나라의 정치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제3국을 원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귀국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제네바협약에는 이와 같은 사항을 예측하지 못하고 예외 규정을 두고 있지 않음으로써 6․25전쟁 포로교환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엔군은 송환을 원하는 포로만 송환시키는 ‘자원송환(또는 자유송환)’ 원칙을 밀고나가는 가운데 공산군 측에 잡혀있는 유엔군 포로도 모두 안전하게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의도로 1:1 교환 방식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공산군 측은 제네바협약에 쓰여 있는 내용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며 모든 포로의 ‘강제송환’을 주장하고 나섰다.
포로교환협상 초기인 1951년 12월,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포로에 관한 자료를 처음 교환하고 보니 그동안 서로 예상하였던 것과 너무 많은 차이가 났다. 유엔군 측이 전달한 명단에는 공산군 포로가 13만 명[유엔군의 포로 131,474명] 정도인 반면, 공산군 측이 전달한 명단에는 유엔군 포로가 1만 명[공산군의 포로 11,559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1950년 말 공산군 측이 유엔군 포로 숫자를 5만 명이라고 발표했던 것과는 너무 큰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유엔군 측은 공산군 측이 이제 와서 고작 1만 명 남짓한 명단만 제시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고, ‘사라진 국군포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1:1 송환 원칙을 제시하였지만, 공산군 측이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유엔군 측도 1:1 방식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군 측은 모든 포로들을 전부 대 전부(全部對全部)로 한꺼번에 맞바꾸자고 주장하였다.
유엔군 측은 자원송환을 밀고나가면서 붙잡혀있는 민간인들도 포로교환협상 의제에 포함하여 타결해야 한다고 제안하여 공산군 측으로부터 원칙적인 동의를 얻어내었다. 이것의 핵심은 포로와 민간인의 자원송환에 있었다.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이 2년간 이어오면서 1953년 6월에 접어들어서 휴전회담의 핵심 쟁점이었던 포로교환 문제가 타결되고, 양측 대표가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서 이제 휴전협정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1953년 6월 8일 타결된 포로송환협정에 따르면, 양쪽은 휴전이 성립된 뒤 2개월 안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을 맞바꾸는 한편,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넘겨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송환을 끝까지 거부하는 포로에 대해서 구체적인 처리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통일을 원하던 남한 국민의 뜻과는 정반대로 진행되는 휴전회담의 진전, 즉 포로송환협정의 타결은 남한 국민을 크게 자극하였으며, 전국에 걸쳐 거센 휴전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1953년 6월 18일, 포로송환협정을 무시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독단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미국과 북한 측은 크게 항의 하기도하였다.
197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이미 체결된 포로송환협정에 따라 8월 5일부터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 포로 송환을 위한 수송 대열이 남과 북에서 각각 판문점을 향하여 이동하였다. 이렇게 해서 1953년 9월 6일까지 장장 33일간에 걸친 포로송환이 완료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도 곧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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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전쟁포로라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없으며, 정해진 법에 따라 대우해야 한다고 한다.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와 관리 및 처리 등은 어디에 규정되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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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제네바협정 118조에는 전쟁포로에 대한 어떤 내용이 규정되어 있으며, 이 규정이 갖고 있는 문제점(또는 한계점)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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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6.25전쟁 포로송환협상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각각 어떤 방식을 주장하며 대립하였나요?
주인공 이명준은 철학과 학생으로 아버지의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있다. 그는 자기만의 밀실에 들어앉아 현실을 편협하게만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 살면서 대남 방송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 빌미로 이명준은 경찰서에 불려가서 구타를 당하면서 아버지와 현재 어떤 연락이 있는가 조사를 당한다. 형사들은 그를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이를 계기로 그는 남한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한다. 그러나 이명준의 비판적 눈에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제도의 굳어진 공식인 명령과 복종만이 보일 뿐이며, 활기차고 정의로운 삶은 찾을 수가 없었다. 즉, 진정한 삶의 광장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명준은 남과 북에서 이념의 선택을 시도했으나, 어느 곳에서도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는, 일종의 허무주의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명준은 ‘은혜’와의 사랑에서 이념의 무의미함을 다소나마 보상받지만, 그것은 개인적 삶의 한정된 행복일 뿐이고 진정한 의미의 광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전쟁에 뛰어든다. 그렇지만 전쟁에서도 새로운 삶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포로가 된다. 포로 송환 과정에서 남과 북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길을 맞게 된 그는 중립국을 택한다. 이제 그가 나설 광장은 남쪽과 북쪽 어느 곳에도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을 싣고 가는 인도의 상선 타고르호가 남지나해를 지나 항해하는 어느 날 밤, 그는 바다에 투신 자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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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남한에 살던 이명준은 왜 월북을 하였으며, 북한에서의 삶은 더 좋아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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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포로 송환 과정에서 이명준은 어디로 갈 것을 선택하였으며, 왜 그곳을 선택하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