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명은 1894년 충청북도 충주시 이안면 삼주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근(友槿)이고 본명은 유흥식(柳興湜)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천자문․동몽선습․소학․대학․논어․맹자․통감 등을 배웠다. 1910년 결혼을 하였고, 1911년 충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의 연정학원을 거쳐 1912년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당시 유자명의 꿈은 농학자가 되어 독립된 조국을 배불리 먹고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1916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봄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원으로 취직하여 보통학교 4학년 농업과 담임을 맡았다. 유자명은 일본정부가 만든 학교에 근무한 다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결코 일본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패망한 후 그가 가르친 아이들이 농학자가 되어 국가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유자명은 학교에서는 유능한 교사로 가정에서는 2명의 아들을 둔 가장으로 충실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며칠 뒤인 1919년 3월 10일경 범바위에서 열린 충주간이농업학교의 졸업기념 야유회에서 유자명은 학생 오언영 등과 함께 충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였다. 농업학교 학생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의논하여 교회 측과 제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서울의 신학교에 재학하는 장양헌이 가져온 일제에 대한 경고문 수백 장을 교회 안에서 유석보의 협조 아래 비밀리에 복사하였고, 범바위 야유회에서는 유석보가 교회 측의 연락을 맡았다. 이 경고문은 각처에 배포되었으며 교인들의 독립만세시위 준비 장소는 탄금대로 바뀌어 비밀리에 태극기와 경고문 등을 준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충주 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 여교사 김연순에게 독립운동계획이 담긴 권유문을 보내어 보통학교 여학생들에게 참가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준비가 한창일 무렵 유자명의 보통학교 동창생으로 경찰서에 있던 황인성이 유자명에게 체포의 위험이 있으니 몸을 피하라고 한 것이다. 유자명은 본가로 가서 아내와 아이들과 하루 밤을 보낸 뒤 중국 망명길을 떠나게 되었다.
유자명은 이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 날 밤 유난히 달도 밝았습니다. 달빛 속에 잠든 아내와 그 품에서 새근새근 자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올지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야 하는 그 때의 심정은 무엇으로도 비유가 안 됩니다.”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유자명은 다시는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모님과 형님한테 작별의 인사도 하지 못하고, 처자를 안아주지도 못하고 떠난 것을 평생 후회했고 가슴 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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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유자명이 독립운동가의 길을 가게 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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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유자명은 평생 고향에 남겨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였다고 합니다. 가족들마저 버리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마음에 대하여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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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유자명 아들의 입장에서 가족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떠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 써 봅시다.
아나키즘의 사전적 의미는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모든 정치적 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기관의 강제수단 철폐를 통하여 자유․평등․정의․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및 운동으로서, 국가나 정부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국가나 정부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나키즘은 인간이면 갖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이론화시킨 것이 근대의 아나키즘이다. 따라서 ‘권위를 부정하고 그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은 누구나 아나키스트’라는 정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적절한 표현이다. 이런 근대적 아나키즘은 일본과 중국에서 20세기 초에 수용되었고, 우리나라는 이보다 조금 늦은 1920년대 초에 수용되었는데 외세지배하의 특수한 환경으로 주로 테러를 사용하는 급진투쟁적인 방면으로 수용되었다.
유자명이 아나키즘을 수용한 이유는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국가권력 반대를 일제 식민지권력에 대한 반대와 동일시하고,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테러의 수단으로 일제의 우두머리들을 암살하고 일제의 통치기관을 폭파하는 것을 반일애국운동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식민침략전쟁을 변호하는데 이용했던 생존경쟁론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는 아나키즘의 ‘상호부조론(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개념에 있다고 인식하였다.
유자명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전성기였던 1921년, 텐진〔天津〕에서 김원봉을 만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 유자명은 이회영, 신채호 등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의 주요한 수단으로 폭력적 방법을 사용하는 아나키즘을 채택하고 의열단에 가입한 것이다. 여기서 맡은 일은 주로 통신 연락과 선전 작업이었다.
유자명이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의열단의 아나키즘적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의열단은 초기부터 어느 정도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유자명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이 의열단에 가입하거나 관계하면서, 의열단의 활동에 아나키즘적 성격이 강해진 것이다. 즉 아나키즘에서는 민중을 각성시켜 민중 스스로 일어나 혁명을 완수시켜야 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 민중을 각성시키는 방법으로 폭력 등을 동반한 선전활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활동은 일종의 선전활동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이를 독립운동의 방향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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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아나키즘의 의미를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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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유자명이 아나키즘을 수용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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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유자명이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생긴 의열단의 변화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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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유자명이 의열단에서 주로 맡은 일은 무엇인가요?
아나키즘을 기반으로 한 의열단의 활동에 대하여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의열단은 자신들의 이념과 정체성을 대내외에 알릴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무조건 암살이나 파괴만을 일삼는 테러조직이 아니라 명확한 항일이념과 목표를 가진 독립운동 단체임을 밝힐 필요가 생긴 것이다. 특히 공산주의 세력이 테러에 반대하는 방침에 따라 의열단 활동을 비난하고 나서자, 이에 맞서 의열단의 활동 방법인 테러활동을 주요한 수단으로 하는 독립투쟁의 방법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2년 겨울 유자명이 주선하고, 김원봉이 요청하여 신채호와 유자명이 함께 약 한 달 동안 합숙하면서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하였다.
선언문은 먼저 일제의 통치가 조선 민족 생존의 적이 된 상황에서 자치론․내정독립론․참정권론을 주장하는 자나 이에 동조하는 모두를 적과 동일하다고 규정하였다. 또 외교론이나 독립전쟁 준비론 역시 ‘일장의 잠꼬대’요, ‘미몽’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일제의 모든 식민지 지배 권력의 본질이 강권․억압 통치인 것을 파악하고, 그것의 전면적 부정과 파괴로써 새로운 조선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즉 암살과 파괴, 폭동의 형태로 표출되는 모든 행위를 통해 ‘파괴가 곧 건설’이라는 아나키즘적 논리를 주장한 것이다. 이로써 테러가 단지 복수적 감정에서 매국노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처단하던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선언문의 발표는 의열단원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크게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즉 이들은 의열단이야말로 일제 타도에 헌신할 진정한 혁명가라는 강렬한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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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조선혁명선언」이 만들어진 이유를 의열단과 관련하여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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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조선혁명선언」에서 밝힌 의열단의 주요 활동 방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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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조선혁명선언」이 의열단원에게 미친 영향을 써 봅시다.
유자명은 의열단 활동 이외에도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아나키즘적 투쟁이론을 전파하였고, 1929년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여 국제적 연대투쟁을 시작하였다. 1930년에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또 1931년에는 한중연합의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여 투쟁하였다.
이와 같은 유자명의 활동 중에 특기할 것 가운데 하나는 1930년대 후반 중국 내 혁명세력의 통일운동에 노력한 것이다. 유자명, 김원봉, 김규광, 최창익 등이 연합하여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이듬해인 1938년 김원봉을 대장으로 하여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을 때, 유자명은 참모부에 해당하는 지위를 가지고 활동하였다. 또 임시정부와의 통일 문제를 협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유자명의 통일노력은 그의 아나키즘이 민족주의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유자명은 자신의 또 다른 꿈이었던 농학자가 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1930년부터 1935년까지 상하이 입달학원의 농촌교육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0년 임시정부와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임시정부가 이동해 있던 충칭〔重慶〕을 떠나 푸젠성〔福建省〕의 농업시험장에서 일하였다. 1941년에는 구이린〔桂林〕으로 가서 농업기술을 전수하며 활동하다가, 1944년 다시 푸젠성 푸안현〔福安縣〕에 가서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동시에 근처의 과수원과 목장을 관리하였다.
여기서 광복을 맞이한 유자명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바로 귀국을 하지 않고 타이완으로 가서 농림처 기술실, 합작농장 관리소 등지에서 근무를 하다가,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대만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귀국을 서둘렀다. 홍콩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하고 1950년 6월 24일 정화암 일가와 함께 타이완에서 홍콩으로 떠났다. 그러나 홍콩에 도착한 6월 25일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여기서 유자명은 한국으로 귀국할 수도,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중국 후난성〔湖南省〕 호남대학의 교수 초빙하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유자명은 결국 호남대학 농학원 교수로 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이후 유자명은 죽을 때까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온전히 농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유자명은 호남대학의 교수로서 ‘감귤 기원의 연구’, ‘포도 일 년 다숙 연구’, ‘화훼 재배와 원림 분포 연구’, ‘마왕퇴 한묘 출토 농작물 연구’, ‘마왕퇴 한묘 출토 농작물에서 기인하는 벼 재배의 기원’ 등 다양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또 유자명은 1978년 북한에서 3급 국기훈장을 받았고, 1985년 중국에서『중국 현대 농학가전』이라는 책에서 3위에 배열되어 수록되었으며, 1996년에는 호남 과학기술의 별로 임명 된 80명 중의 한 명이 되었다.
한편 1991년 우리정부에서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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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1930년대 유자명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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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유자명의 삶이 여타의 독립 운동가들과 달랐던 점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