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야록』은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로, 야록(野錄)이라 하여 일종의 야사로서 정리한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전 기록은 들은 것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자체가 잘못 전달되어 틀린 부분도 약간 있고 다소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갑오개혁 이후 사실에 대해서도 편년체로 기록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황현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기술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사료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읽어야 정도로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책에서 그의 시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대하여 전횡을 일삼아 국가의 존재가 사라질 정도로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흥선대원군에 대해서는 경복궁 중건, 독단적인 인재등용, 종친문무과 설치로 인한 과거제 문란 등은 부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서원철폐, 탐관오리 징벌, 군역과 환곡의 개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파악하면서, 그의 공과는 반반이라고 평가하였다.
또 대원군의 뒤를 이어 집권한 민씨척족에 대해서는 대원군의 정치적 잔재를 없애는 데만 힘쓰는 동시에 요직을 독점하고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렇게 황현은 대원군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나 세도․척족세력의 횡포와 부패상을 폭로하여 망국의 원인으로 규정하였다.
-
질문1
『매천야록』에 기록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정리하여 봅시다.
-
질문2
흥선대원군의 정책 중 황현의 평가에서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을 써 봅시다.
-
질문3
민씨척족에 대한 황현의 평가가 좋지 않은 이유를 정리하여 봅시다.
-
질문4
황현이 망국의 원인으로 규정한 정치 세력은 어떤 세력인가요?
황현은 고종과 왕비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그는 고종이 궁중의 일상적인 유흥으로 말미암아 정사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모든 관청의 기강과 공무의 해이, 과거제의 문란, 인사관리의 부패, 재정의 고갈 등을 초래하였다고 하였다. 또 고종이 무능하여 청렴․강직한 이건창, 김유연, 조병세 등은 파직시키고, “항간에 아녀자들마저 침을 뱉으며 욕할”정도였던 심순택을 여러 차례 기용하였음을 비난하였다. 또한 청나라 공사 서수붕의 말을 인용하여 고종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서수붕은 1900년(광무 4년) 고종을 만났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 : 길흉화복의 운수)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고종이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 청나라는 벼슬을 팔아먹은 지 10년이 못되어 천하가 크게 혼란해져 종사가 몇 번씩 전복되었는데, 귀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30년이 되어도 왕위가 근심이 없으시니 기수가 왕성하지 못하고 풍속이 아름답지 않다면 능히 이럴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고종이 크게 웃으며 부끄러움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서수붕은 나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슬프다. 한국민이여!"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왕비인 명성황후는 세자의 복을 빌면서 금강산 봉우리마다 사용한 비용이 1만 냥이나 된다고 하였으며 용돈을 충당하기 위해 수령의 정가를 매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당한 을미사변을 서술한 뒤, 이를 애통해하기 보다는 20년 동안 정치에 간여해서 나라를 망치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천고에 없는 변을 당했다고 평가하였다.
-
질문1
청나라 공사 서수봉이 고종에게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
질문2
황현이 지적한 고종의 잘못된 정치의 사례를 써 봅시다.
-
질문3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났음에도 황현이 애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황현은 봉건적인 신분질서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원하였다. 그는 서얼차별에 대하여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였으며, 이 제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정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의 5분의 3이 서자가 차지할 정도여서 잘못된 것을 잡으려다가 지나쳐 나쁘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또한 천인과 서자출신 관료들의 횡포와 족보 위조행위 등을 비난하면서 신분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이후 황현은 신분차별의식을 강조하기 보다는 신분에 관계없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인물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호평하였다. 특히 1907년 호양학교를 세워 신분에 관계없이 어린 학생들을 모아 근대적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한 것은 그의 신분관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1905년 이후 그는 더 이상 신분의식에 집착하기 보다는 신분제가 붕괴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변화양상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황현은 을사늑약 이전까지 농민봉기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황현은 농민봉기의 발생이 탐관오리의 부정, 관리임용제도의 문란, 매관매직 등 왕조체제의 모순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입장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민란이라고 볼 수 있는 동학농민운동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아 전봉준이 참형이 아닌 교수형을 받은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황현은 왕조체제의 모순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신분질서를 옹호하고, 민중의 저항에 대해서는 기존의 권력자들과 비슷한 관점을 보이고 있었다. 급격한 신분제 타파와 민중의 역량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인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열망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즉 황현은 근대적 국가의 성립을 원하기 보다는 왕조의 기강이 바로 세워져 다시 조선이 부흥하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황현이 지닌 인식의 한계이며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다.
-
질문1
황현이 가졌던 신분제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나요?
-
질문2
황현의 신분제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때는 언제이며 이것을 알 수 있는 그의 활동이 무엇인지 써 봅시다.
-
질문3
황현이 파악한 농민봉기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
질문4
황현의 민란(농민봉기)에 대한 인식과 그의 한계에 대하여 정리하여 봅시다.
황현은 다음과 같은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라 낮 누수(漏水)소리만 길고나
상감 조서(詔書) 이제부턴 다시 없을 테지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그저 내 마음 차마 말 수 없어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라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당시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황현의 시에서 언급한 윤곡은 몽골 침입 때 자결한 사람이고, 진동은 참형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일제의 국권피탈에 무장투쟁 내지 항거 등 적극적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자결하는 소극적인 형태로 스스로 죽어감을 아쉬워하였던 것이다.
황현의 지우였던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은 다음과 같은 시로서 그의 자결을 애도하였다. “의를 이룸이 예로부터 전공보다 높거니와 / 이 시(詩)야말로 겨레의 충성심을 깨우쳤다네 / 과연 벌족들은 너무도 잠잠한데 / 한 포의(布衣) 마침내 해동(海東) 이름 드높였네”
-
질문1
절명시에서 ‘지식인 노릇을 하기 어렵다’는 문장의 의미가 무언인지 써 봅시다.
-
질문2
황현이 절명하게 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이건승은 시에서 황현의 어떤 점을 칭송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