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달성공원-광복회 결성지/ㄱ당 결성지(무장 투쟁으로 일제에 대항하려 했던 비밀 결사)

도입

"우리나라 천년의 종사는 회진(灰盡)이 되고 우리 2천년래의 민족은 노예가 되어 섬나라 오랑캐의 악정폭행(惡政暴行)이 날마다 늘어나고 달마다 증가하여 이것을 생각하니 피눈물이 샘처럼 솟아 조국을 회복(恢復)하고자 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이유이며,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도우고 앞날 본회의 의기(義旗)를 동지(東指)할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 자산가는 예축(豫畜)을 하여 본회의 요구에 의하여 출금하기 바란다.……

주의 사항: 본회 회원은 각지에 산재(散在)하여 각자의 동태를 감시할 터이므로 본회 지령을 준수하고 지정 배당금을 평소에 비축해 두었다가 본회의 불시(不時)의 청구를 대기하라. 본회의 정규(正規)는 각자의 행동을 감시하리라."

 

1917년 6월 9일 채기중(蔡基中), 우재룡(禹在龍), 김한종(金漢種) 등이 모인 가운데 조선 각 도의 자산가에 대해 자산의 정도에 따라 지정한 금액을 기부하도록 요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만약 이에 불응할 경우에는 일종의 위험이 있을 것임을 암시해주기로 하였다. 이 때 박상진은 직접 대한 광복회의 명의로 위와 같은 내용의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광복회(光復會)는 1913년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과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 국권 회복단의 일부가 합류하여 결성되었다. 이들은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 모임을 갖고, 단체 이름을 광복회로 정하였다.

한편, 광복회가 결성되었던 달성공원에서는 1928년 5월 20일 만주지역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ㄱ당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1 달성공원
현재 상태 변형 / 1914년 조성된 대구신사가 없어지고, 이상화·허위·이상룡·서병오를 기리는 비석이 들어서는 등 변화를 거쳤다.

1910년대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한 일제는 헌병 경찰을 동원해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민족운동가들은 국외로 망명해 독립 전쟁을 전개했고, 국내에 남아있던 세력들은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독립 의군부·풍기광복단·송죽회·민단조합·기성볼단(箕城ball團)·조선국권회복단·조선산직장려계·단천자립단·선명단·조선국민회·이증연의 비밀결사·흠치교의 비밀결사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이들 단체들은 의병전쟁을 계승한 단체와 계몽운동을 계승한 단체로 양분되는 특징을 보인다.

광복회 참여자들은 한말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참여자들이 중심이었다. 이들 중에는 국권 피탈 이후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광복회 결성에 참여한 이도 있고, 1910년 이후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한 이도 있다.

광복회원들은 광복회 결성 이전에 독립 의군부·풍기광복단·민단조합·달성친목회·조선국권회복단 등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독립 의군부에는 유장렬과 한훈이 참여했고, 풍기광복단에는 채기중, 한훈, 유장렬, 유창순, 강병수, 정운기, 정진화, 전봉초, 양제안이, 민단조합에는 정운기, 강병수, 조용필이 참여했다. 조선국권회복단에는 김재열, 박상진, 이시영, 정순영, 정운일, 최준이 참여했고, 달성친목회에는 김재열, 박상진, 이시영, 정순영, 정운일, 홍주일이 참여했다.

한편 1920년대에는 만주 지역에서 무장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뒷받침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국내에서도 비밀리에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ㄱ당’이 여기에 해당된 단체이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모여 1915년 7월에 대구에서 결성한 혁명단체로 박상진이 주도하여 처음에는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광복회의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광복회는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군대 양성을 추진했다. 광복회는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결성되었다. 광복회원들은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의무라 여기고 광복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해 성심으로 단체를 조직하면 강토의 회복과 광복은 당연히 도래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목적이 달성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회는 국권 회복을 위한 군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군대식으로 편제를 하였다. 광복회의 무장 투쟁적 성격은 투쟁 강령을 보면 명확하게 나타난다.

 

"1. 무력 준비: 일반 부호의 의손(義損)과 일본인의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압수함으로써 무장을 준비함.

2. 무관 양성: 남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인재를 가르치고 양성하여 사관(士官)으로 채용함.

3. 군인 양성: 우리 대한의 옛 의병, 해방 군인과 남북 만주의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시켜 채용함.

4. 무기 구입: 중국과 러시아에 의뢰하여 구입함.

5. 기관 설치: 대한(大韓),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 기관을 설치하되 대구에 상덕태(尙德泰)라는 상회(商會)의 본점을 두고 각지에 지점과 여관 또는 광무소(鑛務所)를 둠으로써 본 광복회의 군사행동의 집회, 왕래 등 일체 연락기관으로 함.

6. 행형부(行刑部): 우리 광복회는 행형부를 조직하여 일본인 고등관과 우리 한인의 반역분자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살해함.

7. 무력전: 무력이 완비 되는대로 일본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완성을 기함."

 

광복회의 투쟁 강령 대부분이 무력 준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은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방략이었다. 광복회의 이러한 목적은 1910년대 독립 전쟁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독립 전쟁론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자금을 조 달해 군비를 갖춘 뒤 일제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인(韓人)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자금을 조달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방략이었다. 이러한 독립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시도는 일찍이 서간도 지역에서 신민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객관적 조건의 유리함을 바탕으로 신민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집단적인 한인거주 지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광복회의 목적은 무장 투쟁을 통한 독립의 달성이었다. 광복회는 의병계열과 계몽 운동 계열이 연합해 설립된 단체였기 때문에 양 계열이 추진했던 무장 투쟁론과 실력양성론이 투쟁방략에서 서로 연합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광복회는 독립 전쟁을 위해 사관학교를 설립해 무력을 양성한다는 근본 목표를 설정 할 수 있었다. 의병전쟁의 무장투쟁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실력양성을 통해 준비가 이루어진 후에 무장투쟁을 감행한다는 방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 양성은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해 국내에서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광복회는 국내의 비밀결사로 결성되었으나, 독립군 양성은 만주에서 추진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 질문1 대한광복단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두 단체를 말해보시오.
  • 질문2 광복회는 대한의 독립을 위해 어떤 투쟁 방식을 택했는가요?
  • 질문3 광복회가 독립군의 양성 장소로 만주를 택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1916년부터는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 등지로 확대하여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박상진, 채기중, 우재룡, 한훈 등 당초의 지도자 외에도 충청도의 김한종(金漢鍾)과 황해도의 이관구(李觀求)와 전라도의 이병호(李秉昊) 등이 가입하여 새로운 중심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그 밖에도 이석대(李奭大), 김좌진(金佐鎭) 등은 박상진 총사령 밑의 부사령(副司令)으로서 만주에 파견되어 있었다. 회원들은 양반출신과 평민출신이 함께 어울려 있었고 직업도 다양하였다. 만주에는 부사령의 조직 외에도 이관구가 설립한 안동의 삼달양행(三達洋行)과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이 거점이었고, 또 길림에는 우재룡(禹在龍)을 가교(架橋)로 한 주진수(朱鎭洙), 양재동(梁在勳), 손일민(孫一民), 이홍주(李洪珠) 등의 별동조직이 있었다. 회원들은 유창순, 한훈, 우재룡, 양제안(梁濟安) 등 의병 출신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박상진, 김좌진, 이관구 등 신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에서 박상진, 이관구는 신해혁명에도 참가한 혁명적 인사였다. 그리고 박상진 등 조선국권회복단의 인사와 이관구는 대종교적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관구는 단군사에 관한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보급하기 위하여 단재 신채호의 서문을 받을 정도로 대종교적이었다.

이와 같은 구성원의 성격으로 볼 때, 대한 광복회는 근대 지향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했으니 이 기회에 국왕 없는 공화국 건설을 목표하고 있었으며, 박상진, 김한종 등 광복회 인사가 일제 경찰에서 주장한 바의 광복회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치를 실현하는 데 있다”였다. 그리고 특히 박상진은 세계 각국의 혁명이나 중국혁명의 교훈을 강조하고 있었다. 국내의 100여 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무기를 준비하여 일시에 봉기하는 혁명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이 경험한 중국의 신해혁명과 같은 것을 이 땅에서 실현한다는 논리였다. 이를 위하여 대구, 영주, 천안, 광주, 삼척, 인천, 서울, 해주, 신의주, 안동만주, 장춘 등지에서 잡화상이나 미곡상, 아니면 여관을 설치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각처의 거점에서는 무기도 수십 정 확보하였고 만주에 인재를 보내 훈련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회원의 활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이었다.

1915년 광복회가 결성될 때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세계가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채응언의 의병 등 아직 의병전쟁이 종식되지 않고 있었고 독립의군부와 민단조합 등의 복벽주의 운동도 전국의 화제로 퍼져 있었으며, 광무 황제의 망명 계획이 발각되어 서울과 지방의 뜻있는 인사에게 민족적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때에 공화주의를 표방하면서 혁명 전략의 대한 광복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향이었고 발전적 모습이었다.

광복회는 상동(上東)광산, 직산(稷山)광산, 경주(慶州)의 우편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았고, 전국의 부호명단을 작성하여 모금하기도 했고, 그에 응하지 않은 칠곡의 장승원(張承遠), 아산의 박용하(朴容夏), 보성의 양재성(梁在誠), 벌교의 서도현(徐道賢) 등 악성 부호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악성 부호의 처단은 1917년과 1918년 초에 있었던 것이다. 처단 현장에는 선언장(宣言狀)을 두었기 때문에 광복회의 소문은 전국에 퍼졌고, 그에 따라 일제의 수사도 강화되어 1918년초부터 관계자가 발각되어 대한 광복회의 조직이 파괴되었다. 이때 박상진, 김한종, 채기중, 김경태, 박봉주, 강순필 등은 사형으로 순국하였고 장두환은 옥사하였다. 그 외에 100명 전후의 인원이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고, 또 이때에는 만주로 탈출하던 한훈, 우재룡, 김상옥 등은 1920년 암살단이나 주비단 관계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그리고 잔존한 회원은 한훈, 우재룡, 김상옥(金相玉)처럼 만주로 망명하여 암살단(暗殺團), 주비단(籌備團) 등을 결성하여 1920년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전후하여 의협투쟁을 전개한 경우도 있었으며, 김상옥처럼 의열단(義烈團)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의협투쟁의 측면에서 보면, 대한 광복회가 암살단과 의열단으로 이어지는 그 선구적 조직이라 할 수 있다.

  • 질문1 광복회 회원 중 신해혁명에 참여했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2 광복회는 어떤 정치 체제를 추구했나요?
  • 질문3 광복회가 무장독립 전쟁을 추진하게 된 대외적 배경을 설명해보시오.
  • 질문4 광복회가 군자금을 모집하는 방식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3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은 경주에서 태어났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의병장 출신인 허위(許爲)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 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 손일민, 김대락(金大洛), 이상룡, 김동삼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 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 국권 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 유림들로서,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 활동단체였다. 그러나 이 단체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 광복단과 제휴하여 광복회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 정운일 등의 인물이 참여했다. 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실천 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 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급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피체되어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지 지주 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의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 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강순필·임봉주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의 부호 장승원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 장두환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 도고면 면장 박용하를 처단하였다.

이때 광복회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본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박상진은 체포되었고, 사형을 언도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 질문1 박상진의 스승인 허위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 질문2 박상진이 판사 시험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퇴하고 만주로 건너갔던 이유를 말해보시오.
  • 질문3 박상진에 제창한 광복회의 4대강령은 무엇인가?
  • 질문4 재산가들의 의연금만으로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여의치 못하자 박상진은 어떤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하려 하였는가요?
  • 질문5 비밀결사였던 광복회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ㄱ당’은 1928년 영남 지역 청년들이 대구에서 조직되었으며, 만주 지역의 독립군 보강을 위한 비밀 결사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1927년에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으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인물들 사이에 이념 차이와 사회주의 내부의 알력으로 민족 운동은 통일적이고 효과적으로 전개되지 못하였다.

이에 신간회의 대구지회 간부인 노차용, 장택원, 정대봉, 이상화, 문상직 등이 1928년 4월 문상직의 하숙집에 모여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구성을 협의하였다. 그 해 5월 20일에 신간회 부산지회의 이강희, 의성지회의 유상묵 등이 대구에 온 것을 계기로 비밀 결사계획이 구체화되어 단체명과 임원 선정을 완료하였다.

이 당의 조직 목적은 전도유망한 청년들을 모집하여 광동군관학교(廣東軍官學校)에 유학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만주방면의 미개간지를 개척함으로써 실력을 양성하여 조선이 독립과 혁명을 실현하는 것이다.

행동강령은 타협을 배제한 절대 해방과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만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때 선임된 임원은 재무부에 노차용, 장택원, 조사부에 이강희, 유상묵, 연구부에 정대봉, 문상직이었다.

그리고 독립투사의 모집 방법과 당의 방책을 위한 구체적 내용은 6월 22일 제3회 회합에서 결정하기로 한 뒤 일단 해산하였다. 그 뒤 노차용 등이 활동자금 조달을 위해 김교식(金敎式)에게 5천 원을 요구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당원 전체가 붙잡힘으로써 해체되었다.

  • 질문1 ㄱ당이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을 설명해보시오.
  • 질문2 ㄱ당이 해체되었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대한광복단기념공원에 있는 대한 광복회추모탑이다.

  • 질문1 광복회 단원의 입장에서 무장 투장 계획을 세워봅시다.

시각자료 2

1910년 박상진이 종숙 박시준에게 군자금을 요청하는 박상진의 편지이다. 편지는 종질인 박상진 의사가 종숙 박시준에게 할아버지 형제인 종조부 박정복 내외분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보내는 사람에게 군자금을 보내달라며 정중하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군자금을 보내주지 않으면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 서찰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질문1 박상진은 군자금을 어떤 목적에 쓰려고 했을까요?
  • 질문2 박상진의 편지를 받은 박시준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추정하여 말해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독립 운동의 방법으로는 무장독립전쟁론 외에도 외교론, 준비론, 문화운동론 등의 방식이 주장되었다. 네 가지 방식에 대한 장단점을 모둠별로 이야기해봅시다.

모둠활동 2

일제에 체포된 박상진에 대한 변론서를 모둠별로 작성하여 발표해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