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주도면밀한 정치·경제적 침략에 의한 식민화 추진을 한국인들은 국권상실이라는 중대한 위기로 인식하였다. 한국인들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지식인 계층은 일본 차관의 증대와 경제적 침략으로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일본 차관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해결책을 모색, 대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권수호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서 들여온 국채를 국민의 모금으로 갚자는 거족적인 애국운동이었다.
제일 먼저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고 나선 것은 경상도 대구지방의 애국지사들이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에서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가 개최되었다. 도내 인사 200여 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은 국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한다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국고금으로 갚을 수 없는 국채를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할 것을 제의하고 자신부터 8백 원을 내겠다고 하였다.
회의 참석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서상돈의 제의에 찬동하였다. 광문사 사장 김광제는 당장에 실시하겠다고 찬동하고 자신의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없애고 3개월 담뱃값 60전과 별도로 10원을 더 내놓았다. 회장의 결심에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여 의연금으로 당장 2천여 원을 갹출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였다.
2월 초순 김광제·서상돈 등은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하여 전국 각처에 널리 공포하고 각 신문에 게재하면서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서울에서 취지문을 맨 처음 보도한 것은 2월 16일자의 『제국신문』이었다. 『제국신문』의 보도는 즉각 서울시민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채보상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참여하였으나 곧이어 광역의 지역별 조직이 만들어지고, 그 조직 안에 다시 직업별·지방별·가문별로 조직이 구성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 보다 민중운동의 적극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1907년 2월 21일 대구성 북문 밖 북후정에서 개최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였다. 대동광문회의 주최로 열린 이날 집회에는 서상돈 등 수 천명의 유지ㆍ신사들과 시민들이 참석하였다. 집회의 주된 의제는 단연회(斷煙會)를 조직하고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모여든 군민의 호응은 열광적인 것이어서 만장일치로 박수갈채하고 의연금을 내었는데, 젊은이, 노인, 모든 신사들, 젊거나 나이든 모든 부녀들, 술파는 노파들, 불구의 거지아이들, 푸줏간 정육상들, 책을 낀 어린이들과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 모두 강개하고 분발하여 의연금을 내었다고 한다. 이날의 소식이 『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황성신문』·『만세보』 등을 통해 전해지자, 각지·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켜 적극적인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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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발의한 대구광문사의 사장 그리고 부사장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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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1907년 2월 21일 북후정에 개최된 집회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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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국채보상운동의 내용에 대해 찾아 써봅시다.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가 구성되었다. 김성희·유문상·오영근 등이 주도한 것인데, 서울 뿐 아니라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지도하기 위한 기구로 생각된다. 국채보상기성회는 취지서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회칙을 제정하여 합법적 운동으로서의 형식을 갖추었다.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는 국채를 갚지 못하면 속국이 되고 말 것이니, 2천만 민중이 담배를 끊고 의연금을 모집하여 국채를 깨끗이 완결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기성회는 의연금을 낸 국민의 이름과 그 액수를 신문에 게재하기로 하고, 유사한 단체와 보조를 같이 할 것을 밝히고, 의연금을 받는 곳으로 7곳을 지정하였다. 의연금을 받는 수전소는 서울 중심부의 출판사를 겸하는 책방, 신문사나 잡지사, 학교에 두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신문들이 선두에서 이 운동을 이끌었다. 『황성신문』은 2월 25일자 논설 「단연보국채(斷煙報國債)」에서, 국채보상운동을 “후일 대한독립사 개권(開卷) 제일장에 대서특서할 일”이라고 찬양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7일자 잡보「대재황언(大哉皇言)」에서는 고종 황제도 국채를 보상하는 일로 담배를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종이 직접 담배를 끊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이 운동이 국가적·국민적인 의거로 공인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민영소·이종건·한규설·심상훈 등 전·현직 대신이나 고관들은 이 소식에 국채를 보상하기 전에는 자신들도 다시는 흡연하지 않기로 하고 의연금 모집에 참여하였다.
3월에 이르면서 전국 각지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기관이나 단체, 개인들의 의연이 계속되었다. 관립학교에서는 교장 이하 학생이나 사환에 이르기까지 단연을 동맹하였고, 각급 부대나 군사학교에서도 성금을 모아 기성회로 보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국채 보상금으로 담뱃값을 거두는가 하면, 인력거 인부들도 국채보상에 동참하였다.
여성들도 다투어 금품을 내놓고 단체를 조직하였다. 대구에서는 2월 23일 패물폐지부인회가 조직되어 부인들이 패물을 국채보상금으로 내놓았다. 서울에서도 국채보상부인회 등이 조직되었다. 평양에서는 술집 여자종업원 30여명이 의연금으로 가락지를 모았다. 이처럼 많은 부인 애국단체가 조직되어 가락지나 패물을 내놓았고, 쌀과 찬거리를 절감하여 의연금을 모아 내기도 하였다.
또 국채보상운동에 대하여는 언론기관 이외에 사회단체들의 호응도 적지 않았다. 애국계몽단체, 학회, 언론기관들은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서를 보도하고 이 운동을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대한자강회·황성기독교청년회·서우학회 등은 국민의 의무와 단연 등에 관한 토론회와 강연회를 자주 가져 국민의 애국심을 환기하고, 절용보국(節用報國)의 생활을 호소하였다. 모임은 대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지석영 등이 담배의 해악 등에 관하여 강연하였고, 윤효정·유맹·김택진 등이 토론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열렬한 호응 속에 1907년 3월 말까지 전국에는 27개의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해외의 한인사회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단연과 금주를 통해 의연금을 마련하여 황성신문사로 보내 왔다. 미주 한인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에서는 각각 「국채보상의연발기서」,「국채보상취지서」가 발표되어 동포들의 의연을 촉구하였으며, 하와이,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의연금이 모집되어 황성신문사에 전달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도 국채보상금을 모금하여 국채보상기성회로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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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전·현직 대신 및 고관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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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1907년 3월말 전국에 설립된 국체보상운동 단체는 모두 몇 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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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운동에 참여한 계층이나 지역의 측면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의의를 써봅시다.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요약)
무릇 신민이 忠(충)으로 행하고 義(의)를 숭상하면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평안을 누리며, 不忠(불충)하고 不義(불의)하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의 멸함은 고금의 역사에 근거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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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일본이 청일 ㆍ러일 전쟁을 치를 때 소국이 대국을 이긴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와 결사대가 있어 피바람의 전쟁터를 흡사 樂地(낙지)에 나아가듯 하였기 때문이다. 후방의 국민들은 짚신을 삼아 팔고 죽을 먹으면서, 여자들은 반지를 팔아 兵費(병비)를 마련하였음이라..
아, 우리 이천만 동포는 국가가 이처럼 위난인데도 결심하는 이 없고 방도를 기획하는 일 한가지 없으니.. 나라가 망해도 괜찮단 말씀인지.. 우리의 국채 1,300만원은 대한의 存亡(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우리가 어찌 월남 등 멸망한 민족의 꼴을 면할 수 있으리오.. 이천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국민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서 잠시만 결심하면 갚을 수 있는 일이라..
아, 우리 이천만 가운데 애국사상이 조금만이라도 있는 이가 있다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가 감히 이를 발기하고 취지문을 부치면서 피눈물로 복원하노니, 대한의 신민 첨군자는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고 알려 모르는 이가 한사람도 없게 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聖明(성명)에 보답하고 아래로 우리 강토를 보존하기를 천만행심이로다.
「대구군민대회」
음력 정월 초 9일에 달구벌 내외 일향 유지신사 서상돈 제씨 등 수백명이 북후정에서 대회하니 모인 사람이 남녀노소 무릇 수만 명이라. 신사 박정동씨가 연단에 올라 통론하기를... 채주가 독촉하면 필경 강토를 보존 할 수 없을 것이니 우리 백성 장차 어디서 기거하여 생활할 것인가 ....
[ 우리가 일용에 무익한 연초를 3개월 기한으로 끊고 그 소모비용으로 각자가 1원씩만 모으면 전국인구에 담배피지 않는 부녀자를 제하여도 1천 2백만원이 될 것이니 국채를 갚음이 어찌 걱정이랴 ]하니 이에 만장일치로 박수갈채하고 각자 주머니를 풀어 의연하니 고취하는 소리 소나기에 물이 넘쳐흐르듯 함이라.. (장지연,「논설」,『대한자강회월보』9, 1907년 7월)
「국채보상기성회 취지문」(요약)
지난날 이집트에서 영국과 불란서의 차관을 들여올 때에도 처음 마음을 어찌 정부의 화가 되기를 바랐으리오마는 단지 빌리는 사람의 처리가 좋지 못하여 식민지 백성이 되고 말았으니.
대저 국민 된 자 - 만약 여러분의 자본을 내어 위로 국가의 수용에 응하고 아래로 국민의 부강을 이룰 수 있다면 어찌 즐겨 돈을 희사하지 않고 굳이 가져 있으면서 남에게 구걸하여 빌리려 하리오.
지난날 우리 정부가 진보에 급급하여 들여온 국채가 1,300만원이라. 그 마음에 어찌 차관으로 돈을 불려서 국가의 대사업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으리오. 그러나 오늘에 우리 2천만 동 포들이 가령 한 사람이 1원을 낸다면 2천만원이요, 50전씩이면 1천만원이니, 백성들이 진 빚을 갚는 일이 어찌 불가능하리오……
지난날 보불(普佛)전쟁 때 불란서 국민은 의연금 출연자가 수십 수백만이었고, 또한 집집마다 한 개씩 놋숟갈을 공납했으나, 수백만 개의 숟가락에 그 많고 적음과 가볍고 무거움이 어찌 꼭 같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그 국민이 함께 나라를 부축하자는 마음은 꼭 같은 것이라. 이에 본인 등은 멀리 동래·대구의 여러분들과 뜻을 함께 하기를 바라면서 단합 일체하여 회(會)를 만들었으니, 이름이 국채보상기성회라. 이에 우리 동포는 포고하여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를 바라노니, 아! 국가가 망하면 국민이 망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여 열심히 하옵시다. 그리하여 뒷날을 기다려 국채를 깨끗이 청산한 연후에 세계 제일의 향기롭고 좋은 담배 수천만 잎을 구입하여, 온 나라 남자·여자·젊은이·어른 모두가 내뿜는 담배바람 속에서 맑은 날의 흥취를 돋우어 봄이 어떠하리오.(『황성신문』 1907년 2월 25일자 ;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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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국채보상운동에서 의연금 마련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자 한 물품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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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을 갚으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